에도 시대판 마녀사냥 - 외딴집
피리술사로 시작된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 시리즈 읽기가 이제 여덟 번째다. 오랜만에 에도 시리즈를 읽으려고 하니 처음 피리술사를 읽기 시작할 때 느꼈던 공간적, 시간적 배경에서 오는 '낯섦'이 되살아났다. 여태껏 읽었던 에도 시리즈 중 가장 힘들고 어려웠다. 에도 시대가 배경이긴 하지만 공간적 배경은 '에도'가 아닌 '마루미번'이다. '번'은 요즘으로 따지면 '지방정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그동안 미미여사의 소설 속에 등장했던 의 '에도'와는 조금 달라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생경한 용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공간적 배경과 마루미번을 둘러싼 상황을 설명하는데 대부분을 할애한 ‘상’권은 다른 에도 시리즈보다 훨씬 어렵게 느껴졌다.
'에도 시대'는 '에도 막부'가 통치하던 시대를 뜻하는 말로 '에도'는 오늘날의 도쿄 지역이다. '막부'는 군사정권을 의미한다. 막부 시대의 왕은 상징적 존재로 실질적 통치는 최고 권력자인 '쇼군'이 한다. '쇼군'은 휘하의 무사들에게 각 지역의 ‘땅(번)’을 나누어 통치하도록 하고, 이렇게 쇼군에게 영지를 나누어 받은 무사들을 '번주(다이묘)'라고 부른다. 세계사 시간에 배운 중세 봉건제도의 모습이다. 이런 통치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대체로 쇼군은 강력한 권력으로 휘어잡거나 혼인관계를 맺거나 인질을 볼모로 잡는 방식으로 ‘번(다이묘)’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견제한다. 미야베 미유키의 <외딴집>에서는 이런 쇼군과 ‘번’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소재로 한다.
<에도 막부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근거지, 히메지성>
막부 재정 담당관 ‘가가’는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체포된다. 쇼군은 그에게 벌로써 마루미번’에 유폐되도록 하는데, 어촌 마을 ‘마루미번’은 쇼군이 보낸 죄인 ‘가가’의 처치를 놓고 곤경에 처한다. 분명 사악한 범죄인임에도 ‘처벌’ 받지 않고, ‘유배’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로 자칫 문제가 생긴다면 쇼군의 진노를 얻어 ‘번주’가 바뀌거나 ‘번’이 해체될 수 있다.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 쇼군이 살려둔 ‘가가’가 죽거나 탈출하게 된다면 ‘쇼군의 명령을 지키지 못한 죄’이고, ‘가가’를 너무 대접한다면 ‘쇼군이 벌을 내린 범죄자를 중히 여기게 되니 이 또한 죄’일 수밖에 없다. 진퇴양난이다. 여기에 ‘가가’가 ‘아내와 아이를 죽인 괴물’이라는 소문까지 더해져 마루미의 주민들은 동요하며, 하필 이때 살인, 변사 등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한편, 첩의 자식으로 천대 받고 자라다 마루미번까지 흘러 들어온 ‘호’는 조금 어리숙하고 순진한 여자아이로 우연한 기회에 ‘가가’가 유배된 저택의 하녀로 들어가게 되고, ‘가가’와 조우한 뒤 그가 악인이 아님을 알게 된다.
'사회파 소설가'로 불리는 그녀답게 미야베 미유키는 작품마다 온갖 사회 문제를 담아내는데, 이번에는 '정보 조작’과 ‘은폐’를 주제로 삼았다. 철저한 계급 사회인 에도 시대는 계급 간의 정보가 투명하지 않았다. 소수의 상위 계층만이 권력의 유지를 위해 서민들을 속이고 통제하며 희생시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에도의 막부에서 마루미번, 번 안에서 '번주'와 그를 따르는 귀족, 하급 무사, 하급관리, 마을의 파수꾼들, 그 아래 어부나 염색공 같은 평민에 이르기까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계급의 계단에서 벌어지는 정보의 은폐나 통제와 희생의 강요를 보여준다. 마루미번의 번주와 가신들은 ‘가가’의 사연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살인은 은폐하고, 순진한 소녀 ‘호’를 속인다. 또 서민들에게 공포감을 유도하기 위해 죄 없는 아이들을 서슴없이 죽이거나 소문이 부풀려지도록 내버려둔다. 정보가 발달한 요즘 세상에선 생각도 하지 못할 일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정보가 너무 빠르고 광범위하게 퍼져 오히려 왜곡이나 은폐가 쉬울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요즘 정확하지 않은 정보나 잘못된 소문이 얼마나 빨리 퍼져나가는가? 한쪽의 일방적인 이야기만 듣고 마녀사냥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가가’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그를 악귀로 몰아가는 것과 잠깐의 실수로 앞뒤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남을 비난하는 마녀사냥은 전혀 다르지 않다. 정보의 은폐와 왜곡은 시대만 에도와 현재로 다를 뿐 충분히 오늘날에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현대물도 아니고 시대극에서 이런 주제를 끌어내다니 미야베 미유키는 재주도 좋다. 상권은 많이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재미가 더해지니 이 책에 도전했다면 모쪼록 끝까지 읽으시길…
언젠가는 반드시, 전부 밝히도록 하자. 더 이상 아무도 비밀 때문에 괴롭히고 괴로워하지 않는 세상으로 만들자 비밀 속에서 사람의 목숨이 사라지는 일이 없는 세상으로.
그렇게 맹세하고 있는 ‘누군가’가 여기에도, 저기에도, 곳곳에 있을 것이다. -p.240
외딴집 - 상 -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
외딴집 - 하 -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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