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전염', 다단계 -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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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서점에서 엄청난 두께에 압박감이 밀려오는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중고서점을 애용하는 상황에서 좋아하는 작가의 출간 최신작을 중고로 획득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즐거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잠깐 '새 책과 다름없는 책을 중고로 살 수 있다니 얼마나 행운인가?'라고 기뻐했다가 이내 '새 책과 같은 중고 책이라서 책값 역시 거의 새 책과 다름없구나'하고 느껴버렸지만.
이 책은 무려 864페이지 두께로 무게가 960g으로 L전자의 인기 노트북과 무게와 동일한 무게다.
노트북과 같은 무게이니 들어보면 실로 무겁다. 부피 또한 15~6년 전 <수학의 정석 - 공통수학>보다 더 두껍다. 이러한 두께에도 불구하고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된 것에 대한 '출판사의 변'을 북스피어 블로그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독자의 호흡을 끊지 않고 끝까지 단숨에 읽기 하기 위해서'라고 하니 배려심 넘친다 할 수 있겠다. (책을 나눠서 출간했으면 분명 책값 쪽도 부담이었으리라...)
나 역시 호흡을 끊지 않고 거의 만 하루 동안 식사와 틈틈이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한 수면(낮잠)만을 반복하며 이 책만 읽었는데, 누구라도 읽기 시작하면 호흡을 끊지 않고 단박에 읽을 것 같다. 그 정도로 몰입하게 하는 무엇이 있었지만, 도중에 손을 놓아 흐름이 끊긴다면 다시 이어가기도 좀처럼 쉽지 않을 것 같다.
이 책은 미야베 미유키의 특유의 사회파 작가적 성향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그녀는 앞서 이 책의 주인공 '스기무라 사부로'가 등장하는 <누군가>와 <이름 없는 독> 두 편의 소설을 출간했는데,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은 그가 주인공인 세 번째 시리즈다. 작품의 전체 내용은 스기무라가 작품의 핵심 사건인 할 수 있는 '다단계 사기'를 파헤쳐 가는 과정을 서술하는데, 시리즈를 읽지 못한 사람에게 스기무라의 '삶' 또는 '개인사'를 이해시키기 위해 할애된 부연설명과 사건의 경과에 따라 그를 둘러싼 주변의 일들이 뒤얽혀 다소 복잡하다.
스기무라는 재벌가 막내딸과 결혼해 장인의 회사 사보 편집팀에서 일한다. 어느 날 그는 취재를 위해 상사와 함께 전직 임원을 인터뷰하고 돌아오던 중 권총을 든 노인에 의해 버스 납치에 휘말리게 되는데, 노인은 자신이 지목한 세 사람을 불러올 것을 요구하며 경찰과 대치하다 자살하고 만다.
인질극이 벌어지는 동안 노인은 특이하게도 인질들에게 사과의 뜻으로 위자료를 주겠노라 약속한다. 하지만 범인이 자살하면서 위자료에 대해 잊고 말았는데, 어느 날 배달된 위자료로 인해 스기무라와 다른 인질들은 혼란에 빠진다. 스기무라를 제외하고 각자의 사정으로 돈이 필요했던 인질들은 돈의 출처와 인질범의 정체를 조사하기 시작하고, 그 뿌리가 전국적 다단계 사기 사건과 이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미야베 미유키는 이 책에서 '다단계 사기'를 강경한 어조로 비난한다. <화차>가 '신용 대출'을 비난하는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녀는 돈과 얽힌 범죄에 대해 굉장히 반감을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 돈과 얽힌 범죄가 피해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의 삶에 커다란 악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악질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물론 나 역시 그녀의 생각에 십분 동의한다. 그중에서도 다단계는 더욱 악질 범죄다. 다단계의 경우 대부분 피해자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기묘한 상황을 만들어 내는데, 이를 작품 속에서 '악이 전염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에도 등장하고 있지만 이런 다단계 사기의 상황에서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뉜다는 것이다. '자신은 피해자일 뿐'이라고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과 '스스로 가해자라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베드로의 장례 행렬>인데 예수를 세 번 부인하고 난 뒤 그 죄의식으로 인해 순교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스스로 자신이 <다단계 사기>의 가해자로 전락하게 되었음을 깨닫고, 반성하는 인물들과 겹쳐 보인다. <화차> 이후의 제대로 된 미야베 미유키의 장편이었는데, 다른 작품들도 궁금해진다.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 렘브란트作>
성인 베드로는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을 회개한 사람이었다. 한 번은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을 했지만 거짓말을 지고 살아갈 수는 없다며 처절한 죽음을 선택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망쳐도 베드로는 예수 옆에 남아 있었잖아. 끝까지 열심히 버텼기 때문에 엄한 추궁을 당하고 거짓말을 하게 돼 버렸어.- 베드로가 좀 더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면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됐겠지. 용기와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수치로 괴로워하게 됐어. 옳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죄를 진거야.거짓말이 사람의 마음을 망가뜨리는 까닭은, 늦든 이르든 언젠가는 끝나기 때문이다. 거짓은 영원하지 않다. 사람은 그렇게 강해질 수 없다. 가능하면 올바르게 살고 싶다. 착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라면,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이유로 한 거짓말이라도 그 무거운 짐을 견딜 수 없게 되어 언젠가는 진실을 말하게 된다.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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