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범죄와 고령화 - 붉은 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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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범죄와 고령화’ - 붉은 손가락
54번째로 만나는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먹먹함이 느껴졌다.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다.” 책 장을 덮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맨 처음 그의 작품 <용의자 X의 헌신>을 읽고 그에게 매료된 이후로 54번째 만나는 작품 <붉은 손가락>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많은 소설 끝에는 공통으로 느껴지던 바로 그 감정. ’먹먹함’이었다.
그의 작품 중에는 묘하게 복잡한 사건이나 문제가 해결되면서 등장 인물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작품이 많다. 사건을 벌이거나 거기에 얽힐 수밖에 없었던 인물의 감정에 공감될 때에 독자는(혹은 나만일 수도 있지만) 알 수 없는 답답함과 씁쓸함으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 작품 <붉은 손가락> 역시 그랬기에 정말로 그의 작품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47세의 회사원 아키오는 네 가족의 가장이다. 그의 가정은 겉으로 보기에 평범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왕따를 겪고 삐뚤어져만 가는 아들 나오미. 아키오의 아내 야에코는 고부갈등이 원인이 되어 한 집에 사는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귀찮은 존재로 여겨 돌보지 않고, 삐뚤어진 아들의 온갖 요구를 다 받아주며 상태를 악화시킨다. 물론 아키오 자신도 일을 핑계로 어머니와 아들을 내버려두며 가족 간의 사이가 멀어지는데 일조한다.
이렇게 순탄치 않지만 밖에서 보기에 평범한 것처럼 보이던 그의 가정도 결국 아들 나오미가 동네 꼬마 아이를 살해하며 민낯을 드러낸다. 살인을 저지르고도 태연한 아들과 아들의 죄를 덮기 위해 신고를 막고 시신을 유기하자는 아내. 아키오는 결국 치매에 걸린 어머니에게 아들의 죄를 덮어 씌우는 잘못된 선택을 하고만다.
작품 전반을 통해 히가시노 게이고는 일본 사회의 고령화 문제에 대해 쓴소리를 건넨다. 아키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차례로 모두 치매에 걸리지만, 먼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혼자 돌보며 그의 어머니는 자신의 나머지 삶을 희생한다.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는 어머니마저 치매에 걸리는데 결국 어쩔 수 없이 합가한 아키오의 가족은 어머니를 돌본다기 보다 한 공간에 거주하고 있을 뿐이다. 각자의 생활을 핑계로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아키오의 이런 가정 문제를 개인 책임이 아닌 사회가 책임져야 할 문제임을 이야기한다. 점점 고령화되면서 질병이나 생활고에 시달리거나 범죄에 취약한 노인을 국가가 제대로 케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저게 요즘 일본 가정의 한 전형이야. 사회가 고령화된다는 얘기는 몇 년 전부터 나왔었어. 하지만 그에 따른 적합한 준비를 하지 못한 국가의 책임을 이제 각 개개인이 떠맡게 된 거야.
많은 사람이 안고 있는 고민이지. 국가가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니 각자 스스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어.
139p
또 아키오의 아들 나오미가 저지른 살인과 죄의식을 잘 느끼지 못하는 태도 역시 점점 증가하고 있는 청소년 범죄의 단편을 잘 보여 준다. 범죄의 심각성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인지, 혹은 얕은 꾀를 부리며 자신은 미성년자라 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는 점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는 것인지, 죄의식 없는 그 모습이 요즘 뉴스에서 접하는 한국 청소년 범죄의 피의자들과 같아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그러한 아들의 죄를 덮기 위해 어떻게든 해보라며 남편을 재촉하는 아내의 모습에서 화가 치밀어 오른다.
범죄의 전말이 밝혀지며 아키오의 가정은 결국 파탄나고 만다. 아키오의 선택이 아쉽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위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저버리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들며, 씁쓸함만 남는다. 어쨌든 고령화 문제이던 청소년 범죄 문제이던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만 않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시리즈 물을 잘 쓰지 않는 편인데, <붉은 손가락>에는 그의 대표 캐릭터 중 하나인 가가 형사가 등장한다.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사건이 극적이거나 트릭이 기가 막히진 않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와 가가 형사를 좋아한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 같다.
<드라마의 영향 때문에 '가가 형사'하면, 아베 히로시가 떠오른다.>
붉은 손가락 -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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