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주인이 한 일을 알고 있다? - 미야베 미유키 「나는 지갑이다」
지갑이 주인공인 소설이 있다. 지갑이 1인칭 주인공 시점인 소설이라니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무려 <화차>의 그 미야베 미유키가 쓴 소설이다. 표지에 큼지막하게 <나는 지갑이다>라고 쓰여 있지만, 지갑의 시점에서 서술한 소설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첫 장을 넘기고 정말로 지갑이 주인공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미미 여사의 현대물은 거의 접하지 못했지만 에도 시대 작품과 <스텝 파더 스텝>을 통해 그녀가 조금은 유머스러운 구석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책을 보니 그녀는 정말 많이 재미있는 사람인 것 같다.
한 남자 A가 교통사고로 죽는다. 미망인에게 고액이 사망보험금이 지급될 예정이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교통사고처럼 보이지만, 미망인에게는 다른 남자 B가 있었다. 보험금을 노린 살인이 의심되면서 미망인은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이렇게 시작된 보험사기 살인사건이 꼬리의 꼬리를 문다. 이러한 사건의 과정을 형사, 용의자를 협박하는 공갈꾼, 세 번째 살인의 피해자 조카, 탐정, 목격자, 용의자의 친구 등 총 10명의 인물이 소유한 지갑의 시점에서 서술한다.
하나의 지갑이 한 챕터를 담당하는데, 이렇게 10개의 챕터가 뭉치면 장편소설이 되지만, 각 챕터를 따로 분리해 읽어도 그 자체로 훌륭한 단편소설이 되는 재미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목차만 언뜻 보았을 땐 단편소설집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한 매체에 연재되었던 것을 묶어 낸 것이라는 작가의 말을 보고 각 챕터가 하나의 단편소설같이 구성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어린아이가 아니고서야 지갑을 하나쯤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외출할 때 반드시 챙겨나가기 마련이다. 요즘엔 휴대전화 또한 그러하지만, 소설이 쓰인 1992년을 생각해보면 역시 지갑만큼 흔하게 누구나 가지고 있고, 곁에 두는 물건도 없다. 그런 점에서 '10명의 사람이 모두 가지고 있고, 항상 지니고 다니는 물건인 지갑'을 이야기의 화자로 고른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인듯 싶다. 지갑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인간들이라니 놀라운 상상력이다.
<소설에는 지갑에 눈이 없어 볼 수 없고,들을 수만 있 것으로 나오지만, 사실 귀도 없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미야베 미유키의 초기 작품으로 이후 작품의 소재가 되는 요소들이 많이 들어 있다고 한다. 에도 시리즈로 흥미를 붙인 탓에 사실 제대로 된 그녀의 현대물은 아직 <화차>나 <퍼펙트 블루>밖에 접해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어쩌다 보니 2015년 하반기에는 미야베 미유키를 열심히 읽고 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책을 중고 서점에 팔고, 다시 미야베 미유키의 다른 책을 사 읽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나 나름은 책을 사서 읽고 있는 셈이지만, 출판사의 매출엔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아 다소 미안하다. 매입하는 가격과 판매하는 가격을 비교했을 때 왠지 서점이 괘씸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빨리 미야베 미유키의 다른 책으로 바꿔 읽고 싶다. 이미 구매해 놓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대답은 필요 없어>와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도 기대된다.
나는 지갑이다 -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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