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금융이 만들어 낸 괴물 - 미야베 미유키 <화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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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문학동네 |
작년 한 해 동안 히가시노 게이고를 열심히 읽었는데 어쩌다 보니 올해는 미야베 미유키다. 미야베 미유키를 읽고 있다 말했지만 사실 현대물은 겨우 세 번째다. 이전까지 기껏해야 초기작 <퍼펙트 블루>와 추리나 미스터리라고 말할 수 없는 - 명랑소설이라 부르고 싶다 - <스텝 파더 스텝>이 전부다.
최근에 읽는 책들은 에도 시리즈로 겨우 5권이 전부다. 이래서야 정말로 미야베 미유키의 진면목을 느낄만한 작품을 읽었다 할 수 없다. <화차>를 읽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였다. 에도 시리즈 이후 현대물을 읽을 생각이었지만, 적어도 <화차>는 읽어놔야 어디서든 그녀의 책을 읽었다고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화차>는 미야베 미유키의 대표작이다. <이유>, <모방범> 등도 잘 알려져 있지만, 역시 <화차>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 소설은 '타인의 삶을 훔치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일본과 한국에서 영화화되어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타인의 신분을 도용’하거나 ‘주변인에게 신분을 속이며 벌이는 범죄’를 미디어는 종종 ‘화차 같은 범죄’라고 표현한다.
90년대 초 출간된 이 소설은 당시의 어두운 면을 반영하고 있다. 바로 버블경제 시대의 <소비자금융 - 신용대출, 할부금용, 주택 대출 등> 문제다. 이 시기 일본 내 많은 기업과 가정이 위기에 처한다. 경기가 어렵자 평범한 사람들은 대출을 갚기 위해 대출을 받고, 대출 이자 때문에 또다시 1금융 - 2금융 - 사금융으로 이어지는 대출의 악순환을 반복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빚에 쫓기며 강제 채권추심의 피해를 보거나 도망자의 삶을 살았다. 소설 속 가해자 <신조 교코>와 그 피해자 <세네키 쇼코> 역시 소비자 금융의 희생양이다.
경시청 형사 혼마는 범인 검거 도중 총상을 입고 휴가원을 내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처조카 가즈야가 혼마를 찾아와 사람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찾고자 하는 사람은 가즈야의 약혼녀 세네키 쇼코. 가즈야와 1년 이상 교제하며 약혼 상태인 그녀가 개인파산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가즈야의 부탁을 받은 혼마는 쇼코를 찾기 위해 그녀의 직장과 개인파산을 도왔던 변호사 사무실을 찾는다. 그리고 그 곳에서 가즈야의 약혼녀 세네키 쇼코가 진짜 쇼코가 아님을 알게 된다. 이에 혼마는 쇼코를 사칭하고 다니는 여자의 정체를 캐내기 위해 진짜 쇼코와 가짜가 만나는 접점을 찾기 위한 추적을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긴 추적 끝에 가짜 쇼코의 정체를 밝혀낸다.
신조 교코의 가족은 대출금 문제로 뿔뿔이 흩어져 쫓기는 신세다. 빚에 쪽기던 어머니는 병에 걸려 죽고, 아버지는 실종된다. 여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그녀는 불행한 삶을 구제받고자 일찍 결혼한다. 하지만 그녀를 찾아온 채권자들의 협박으로 행복한 결혼은 3개월만에 깨진다. 다시금 쫓기는 그녀는 채권자들에 의해 시골로 팔려갔다 도망쳐 나오기도 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 받지 못해 빚을 청산할 수 없다.
끝없이 빚에 쫓기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그녀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방법은 타인이 되어 사는 것 뿐이었다. 개인파산을 했던 세네키 교코도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명품을 걸치거나 유흥을 위해 돈을 쓴 것이 아니다. 단지 기숙사 밖에서 작은 방을 얻어 살고 싶은 소망이 빚을 만들었고, 그것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뿐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당시의 <소비자금융> 문제를 신랄하게 꼬집는다. 강제 채권추심을 막을 대책과 개인파산 제도 보완, 고도성장 시기의 무분별한 카드 발급 방조 등 많은 이가 겪고 있는 <소비자 금융> 문제가 결국 개인의 문제이기에 앞서 일본 정부의 미흡한 대처로 생긴 사회적 문제이며, 평범한 사람 누구나 신조 교코, 세네키 쇼코처럼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화차>를 읽는 내내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이 떠올랐다. 두 작품 작가의 대표작이기도 하지만, 악녀가 주인공이고 마지막 장을 덮고 난 뒤 찾아오는 묵직함과 공허함 비슷했다. 악랄한 여자였지만 그런 삶을 살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는 작가의 항변도 느껴졌다고나 할까...
고난을 겪고 불행한 삶을 산다고 모두 다 범죄자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때론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이 괴물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런 괴물의 탄생은 충분히 막을 수 있다. 미야베 미유키가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라 불리는 이유는 아마도 이런 탄탄한 이야기 속에서 사회적 모순과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역시 그녀의 진면목은 사회파 미스터리인가보다 에도 시리즈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묵직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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