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노 게이고 <왜소 소설>, 일본 출판계를 풍자한 시트콤 같은 소설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마치 12편짜리 시트콤 한 시즌을 본 것 같았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집 <왜소 소설>은 <괴소 소설>, <독소 소설>, <흑소 소설>과 함께 블랙 유머 시리즈로 분류되는 작품이다. 일본에서는 2012년 출간되었는데 한국에서는 올해 초(2021년 1월)에야 출간되었다. 공교롭게도 지난해에 출간된 단편소설집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2020년 10월)>과 이어지는 비슷한 있는데 두 책 모두 일본 출판계를 소재로 한 풍자 소설이라는 점이 유사하다.
그렇다고 두 작품이 연결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은 2001년 작품이고, <왜소 소설>은 2012년 작품이니 그 사이 텀이 너무 길어 작가가 두 작품을 연결시키는 것을 염두하고 쓴 것은 아닌 것 같다.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은 수록된 8편 모두 서로 다른 등장인물과 설정이 다른 반면 <왜소 소설> 속 12편의 단편은 모두 규에이 출판사라는 곳을 배경으로 벌어져 단편집이지만 장편 소설 같기도 하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규에이 출판사는 엔터테인먼트 소설(추리, 판타지, 라노벨 등)과 문학잡지 '소설 규에이' 등을 출판하는 곳으로 업계 최고도 인기 작가에게 매력적인 출판사도 아니다. 대개는 그럭저럭 한 작가들의 그럭저럭 한 소설을 내고 있다. 그럭저럭 작가들의 그럭저럭 소설들로 회사를 꾸려 나가다 보니 편집자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국의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일본에서 출판 편집자의 역할은 정말 다양하다. 편집자는 작가가 새 책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책이 출간되기까지의 과정을 관리한다. 그 과정에서 작가에게 소설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거나 집필 중인 작품의 진행 방향을 결정하거나 취재를 돕는 등의 깊은 관여를 하기도 하며, 출간 이후의 홍보 및 이벤트를 기획하기도 한다. 때론 작가와 외부 매체(방송, 언론) 사이의 가교도 되어주고, 작가의 대소사를 돕는 등 여러 가지 전반을 서포트하며 매니저 역할도 한다.
<왜소 소설>은 이런 규에이 출판사의 편집자들과 작가들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풍자를 가득 담아 그리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중쇄를 찍자"가 생각났는데 만화와 소설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편집자의 롤이 크게 다르지 않고, 두 작품 모두 코믹한 내용이라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왜소 소설>을 읽는 내내 시트콤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첫 번째로 수록된 "전설의 편집자"부터 그랬다.
규에이 출판부 부장 시시도리는 업계에서 소문난 편집자로 인기 작가의 작품을 따내기 위해 무슨 일이건 뻔뻔스럽게 해내는 사람이다. 어느 날 시시도리는 출판사와 사이가 좋지 않은 여류 작가의 신작 출간을 따내기 위해 그녀에게 접근하지만 계속 거절을 당한다. 시시도리는 결국 작품을 따내기 위해 작가에게 강제 키스를 해버리고 프러포즈를 한다.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받아 본적이 경험이 없을 것으로 보이는 중년의 미혼 작가의 로맨스 판타지를 노린 것이다.
신작을 따내기 위해 인생을 거는 그야말로 시트콤적인 설정이다. "작가 은퇴 기자 회견"도 그렇다.
노년의 작가 사무카와 고로는 규에이 출판사도 포기한 작가다. 과거 몇 편의 작품으로 매출에 보탬이 되기도 했지만, 현 시류에 맞지 않고 팔릴 가능성이 없어 책을 내줄 수 없다. 고로 또한 자신이 더 이상 좋은 소설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은퇴를 결심한다. 하지만, 마지막만큼은 화려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던 고로는 편집자 고사카이에게 자신의 은퇴 기자 회견을 부탁한다.
인기 없는 노작가의 은퇴식과 기자 회견이 가능할 리 없지만 규에이 출판부 직원들은 인맥과 가짜 기자까지 동원해 가짜 기자회견을 치러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고로는 은퇴 소감으로 그동안의 성원에 대한 감사를 담은 소설을 쓰기로 발표한다. 그것도 연재소설을...
정말 편집자가 좌절할 만한 시트콤 같은 상황이다. 다른 작품들 역시 이런 시트콤 같은 전개다. 게다가 몇몇의 패러디로 웃긴 포인트가 더해진다. 기무라 타쿠야가 연상되는 소설 속의 남자 배우 '기바타쿠'라던지 나오키 상이 연상되는 '나오모토 상'이라던지.. 물론, 깨알 같이 특유의 현실 비판도 담겨 있다. 수익이 나지 문예지 출간의 현실이나 중고 출판 시장에 대한 비판 등...
각 단편의 사건을 시트콤처럼 상상하며 봤더니 나름 즐겁고 재미있었다.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중에 버릴만한 게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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