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 - 히가시노 게이고
다작으로 유명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새 책이 어김없이 올해에도 출간되었다. 매해 2~4권의 신간이 나와 대체 어느 정도의 속도로 글을 쓰면 매해 여러 권의 신간을 낼 수 있나 하는 궁금함이 있었는데 사실은 함정이 있었다. 예전 작품을 재출간하거나 쓰인 지 오래됐지만 아직 출간되지 않는 책을 이제야 번역해 출간하는 것이다.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 역시 그런 책들 중 하나로 1988년 작품으로 뒤늦게(30년도 훨씬 늦게) 한국에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국내에서는 신간이지만 작가가 첫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이후 얼마되지 않아 쓴 초기의 작품으로 필력이 미처 완성되기 전이라 그런지 다소 부족함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범죄의 트릭이 허술하고, 범인도 초반에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대단한 트릭이나 반전도 없고, 읽고 나면 범죄에 얽힌 뒷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공감하게 되는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가슴 먹먹한 스토리도 아니다.
오히려 명랑소설에 가깝다. 분위기는 비슷한 시기에 쓰인 <오사카 소년 탐정단>이나 <살인현장은 구름 위>와 비슷한 느낌으로 <연애의 행방>처럼 아주 가볍다. 본격적인 추리, 탐정소설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100% 실망할 것 같다.
주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일본 버블 경제의 정점이었던 1988년. 화려한 긴자의 보석가게 '하나야' 앞을 지날 때면 늘 발걸음을 멈추고 매장 안의 보석들을 감상하는
여자 쿄코는 도쿄의 한 이벤트 회사에서 일하는 컴패니언*으로 일하고 있다.
* 컴패니언 - 연회 같은 곳에서 음식을 서빙하는 도우미 역할. 일본 경제 호황시기에 파티, 연회가 넘쳐나 행사장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서빙하고, 파티객들을 응대하던 직업이 전문직처럼 인기를 얻던 시절이 있다고 한다.
쿄코는 언젠가 부잣집 남자를 만나 결혼해 비싼 보석 따위를 척척 살 수 있는 여유로운 삶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위해 자신이 컴패니언으로 일하는 행사 속에서 부유한 멋진 남자와 엮일 기회를 찾기 위해 안테나를 세운다.
그러던 어느 날 때마침 보석가게 '하나야'의 행사가 종료된 직후 쿄코의 친한 동료 컴패니언 에리가 호텔 객실에서 독살되는데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단 이유로 쿄코는 참고인 조사를 받게 되고, 이후 담당 형사 시바타가 옆집으로 이사오며 사건에 더 깊숙이 개입하게 되며 두 사람이 에리가 살해된 사건과 그 뒤에 숨은 범죄의 실체에 다가가게 된다.
오래전 작품이라 낡은 느낌이 들 것 같지만 LP와 카세트테이프가 등장하는 것과 갓 이사 온 탓에 전화가 개통되지 않아 이웃집에 전화를 빌리러 가는 설정 등을 제외하면 30년 전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위화감은 없었다. 우연히도 이웃해 살게 된 주인공 쿄코와 형사 시바타의 설정은 로맨틱 코미디 같은 설정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장면들은 확실히 리듬감이 있다. 티카타카를 아주 잘한다. 책의 띠지에 "경쾌하고 리듬감 있는 터치의 복고 미스터리"라고 적혀 있는 묘사가 맞는 것 같다.
다소 부족함이 느껴지지만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니까 이 정도는 별 3.5개는 줄 수 있을 것 같다. 가벼운 마음으로 명랑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누구라도 나름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정체불명의 표지 디자인과 작품 본편과 관계없는 제목에 별을 0.5개 빼고 싶을 정도다. 표지가 쓸데없이 화려하다. 게다가 제목은 유행어를 막 가져다 붙인 것 같다. 물론, 원제도 그다지 맥락이 없어서 다시 만든 탓이겠지만 이게 최선인가 싶다.
양장본 15,800원으로 가격은 적당한 것 같고, 밀리의 서재 이용하면 그냥 읽을 수 있다.
윌라에서 오디오북으로도 만날 수 있는데 분량은 7시간 7분으로 전편을 다 녹음한 것 같다. 왠지 라디오 드라마 느낌이려나.. 궁금하다
'추리 & 미스터리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가시노 게이고 <왜소 소설>, 일본 출판계를 풍자한 시트콤 같은 소설 (0) | 2021.08.04 |
---|---|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의 블랙 유머 (0) | 2021.08.02 |
요 네스뵈, 오슬로 1970 시리즈 - 블러드 온 스노우 (0) | 2020.07.02 |
밀리의 서재, 추천 작가 소설 모음(추리/미스테리/스릴러/범죄) (0) | 2020.07.01 |
히가시노 게이고 판타지 신간 - 녹나무의 파수꾼 (0) | 2020.06.24 |
댓글
이 글 공유하기
다른 글
-
히가시노 게이고 <왜소 소설>, 일본 출판계를 풍자한 시트콤 같은 소설
히가시노 게이고 <왜소 소설>, 일본 출판계를 풍자한 시트콤 같은 소설
2021.08.04 -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의 블랙 유머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의 블랙 유머
2021.08.02 -
요 네스뵈, 오슬로 1970 시리즈 - 블러드 온 스노우
요 네스뵈, 오슬로 1970 시리즈 - 블러드 온 스노우
2020.07.02 -
밀리의 서재, 추천 작가 소설 모음(추리/미스테리/스릴러/범죄)
밀리의 서재, 추천 작가 소설 모음(추리/미스테리/스릴러/범죄)
2020.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