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의 블랙 유머
밀리의 서재를 둘러보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을 발견했다. 지난 몇 년간 국내에 번역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모든 소설을 읽는 것을 소소한 목표로 삼아 리스트에서 한 권 한 권 지워왔던 터라 읽지 못한 새 책을 만나는 일이 반가웠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중고 책방에 갈 때면 '혹시 그 책이 중고로 나왔을까'하는 기대를 하게 되는데 중고 책방에 가지 않고도 밀리를 통해 읽을 수 있어 좋았다.(출판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당신이 몰랐던 새로운 히가시노 게이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은 띠지에 쓰인 '카피가 정말 적당하구나' 싶을 정도로 그동안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만 접했을 독자들에게는 조금 다르게 느껴질 만한 작품이다. 살인 사건의 범인과 트릭을 찾거나 절절한 사연을 가진 범죄자의 스토리를 즐기는 작품은 아니다.
단편 소설집임에도 책 표지 어디에도 관련된 내용이 없어 작가의 이름을 믿고 정통 미스터리/추리 소설을 기대한 독자라면 실망감이 들 것 같다. 실제로 온라인 서점의 한줄평에는 '속았다'는 말과 함께 혹평에 가까운 평가도 많다. 나 역시 단편소설집인 줄 모르고 읽다가 하나의 챕터가 끝나고 다음 챕터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제야 단편 소설집임을 알게 됐다.
하지만, 이 책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꽤 반가울만한 작품이다. 블랙 유머와 함께 단편에서만 가능한 장치들이 읽는 내내 낄낄거리게 만들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백야행>이나 <방황하는 칼날>, <공허한 십자가>같이 여러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 몰입감도 높고, 읽는 재미가 큰 작가지만,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 또한 작가의 다른 장편에서 맛볼 수 없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이 책 속에는 총 8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각 이야기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추리소설'과 관련이 있다. 추리소설의 작가이거나 출판사 편집자이거나 추리소설의 독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본인이 추리소설 작가이다 보니 분명 일부 단편에는 본인의 직접 경험했거나 생활하며 한 번쯤 상상했을 법한 내용을 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예를 들면 첫 번째 단편인 '세금 대책 살인사건'이 그렇다.
단편 속 주인공 '나'는 갑자기 인기를 얻게 된 추리소설 작가이다. 우연한 큰 인기로 돈이 생긴 나는 모처럼 여행도 하고, 소비를 즐기지만 고액의 세금고지서를 받게 된다. 이에 나는 세금을 공제받으려 지출 내역을 연재 중인 소설의 집필을 위한 경비로 끼워 맞추기 시작한다. 아내가 쇼핑한 코트는 여주인공의 의상으로, 부부의 하와이 여행은 실종자를 찾는 여정으로, 처가에 사준 자동차는 범인의 범행도구로... 수십 장의 영수증 탓에 소설은 억지스럽게 전개된다.
이 단편을 읽으며 분명 히가시노 게이고도 고액의 세금이나 영수증 처리에 곤경을 겪은 적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어느 날에 영수증을 정리하다가 이런 소설을 써야겠단 생각을 했을 것도 같다. 또 다른 단편 중 하나인 '장편소설 살인사건'은 유행만을 좇고, 작품의 질보다는 과대 포장과 홍보로 일관하는 출판계를 풍자한다.
추리소설가 구즈하라 만타로는 400자 원고지 800매 분량의 소설을 막 써낸다. 하지만, 편집자 오기는 출판가의 유행을 강조하며 '성난 파도 같은 2,300장' 같은 문구로 홍보가 가능하도록 분량을 늘려달라고 한다. 어찌어찌 800매를 1,800매로 늘려 작품을 마친 구즈하라는 다음 작품으로 고교 야구 선수가 등장하는 새 작품을 <커브볼>을 기획한다.
하지만, 때마침 경쟁 작가 역시 야구를 주제로 한 소설을 출간하기로 하며 문제 아닌 문제가 발생한다. 매수를 늘리기 위해 자간을 늘리고, 마침표가 있는 곳은 무조건 줄 바꿈을 한다. 종이의 두께를 늘리고, 표지를 두껍게 하는 등 온갖 꼼수가 동원되며 책등이 책 표지보다 넓은 해괴망측한 책이 탄생한다. "구즈하라 만타로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야구 미스터리 탄생!!! 목숨을 건 8.7킬로그램!'
'장편소설 살인사건'은 너무 웃어서 배꼽이 빠질 정도였다. 원고지 500매 분량의 소설이 무게 8.7킬로그램의 책으로 변해가는 과정이나 과장된 풍자가 재미있었다. 이 또한 작가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으리라 생각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종종 일본 사회 현실을 꼬집고 비판하는 내용의 작품을 써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로 불리는데 단편소설 안에서도 풍자와 비판이 잘 살아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장편보다 단편을 더 좋아한 내 입장에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돈을 주고 책을 사는 것이라면 단편 쪽보단 장편 쪽이 나을 것 같다. 밀리의 서재 하는 분들에 한 해 부담 없이 전자책으로 읽으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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