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의 영혼이 보내는 경고 - 미야베 미유키 「흔들리는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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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에 가면 '땀 흘리는 비석(표충비)’이 있다고 한다.
이 비석에는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면 비석 면에 땀방울이 맺힌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임란에 승병으로 전쟁터에 나가 전공을 세우고 이후 적국에 사신으로 가 백성 3천 명을 귀환시킨
유정(사명대사)의 우국충정 기려 세운 비석이라고 하니 왠지 죽어서까지 나라를 걱정하며 '땀을 흘린다는 비석’ 이야기가 그럴듯하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흔들리는 바위」 속에 등장하는 바위 역시 땀흘리는 비석 못지않게 깊은 사연이 깃들어 있다.
일본의 기이한 이야기들을 모은 10권으로 모은 기담집 ‘미미부쿠로’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고 한다.
에도시대에 한 무사가 폭력을 휘두른 죄(충신장 사건)로 다무라 가의 저택에 맡겨져 지내다가
막부의 명령으로 영주의 저택 정원에서 자결했는데, 그가 할복한 자리에 표식으로 놓은 큰 바위가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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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흔들리는 바위」는 바로 미미부쿠로에 전해져 내려오는 바위 이야기를 소재로 <충신장 사건>을 엮어 쓴 에도시대 배경의 추리물이다.
충신장 사건은 에도시대 당시 무사들의 맹목적 충성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사건으로
다이묘(영주)였던 아사노 나가노리가 다이묘 기라 요시나카에게 칼을 휘둘렀다가 쇼군의 명령으로 할복한 후
주인을 잃은 47명의 무사가 주인을 위해 기라 요시나카를 베고 자수해 전원 할복 자결한 사건을 일컬는다.
이 사건은 나중에 이야기 속 인물들의 이름만 바뀌어서 <주신구라>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데,
<주신구라>는 수차례 영화화 드라마로 만들어질 정도로 일본을 대표하는 고전 문학이라고 한다.
이 사건이 비극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사노 나가노리가 기라 요시나카에게 칼을 휘두른 이유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인데,주인을 잃은 47인의 사무라이가 목숨을 걸고 주인의 복수를 행한다는 점에서는 무사도를 중요시 생각하는 사무라이의 본분을 잘 지킨 것으로 세간의 칭송을 받을만하지만, 사무라이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 애꿎은 목숨을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1800년대의 사무라이 - 출처: 위키백과>
소설의 배경은 충신장 사건이 벌어진 뒤 100여 년이 지난 후로 어린 시절 화재로 부모님을 잃은 뒤 종이가게 양녀로 들어가 살아가는 주인공 오하쓰는 귀신이나 혼령을 보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러한 오하쓰 영험한 능력은 오캇피키(에도시대의 탐정)인 그녀의 오빠 로쿠조의 사건 해결에 종종 도움이 되는데, 어느 날 그 능력 탓에 '흔들리는 바위'의 조사를 맡게 된 그녀는 두 건에 걸친 어린이 유괴 살인 사건과 맞닥뜨리게 되고,살인 사건의 범인이 백 여년 전 죽은 어느 이름 없는 무사(편의상 악당 무사)의 악령인 것을 알게 된다.
이 악당 무사는 일자리를 잃고 가난에 허덕이며 도둑질과 살인 같은 악행을 벌이던 중 충신장 사건의 아사노 나가노리가 47인 무사들과 합류하려고 했으나 거절 당한자로 이때 그 47인의 무사 중 한 명(선한 무사)에게 악행을 발각 당해 처분 당하는데,100여 년 후 악한 무사의 악령이 나타나 살인 사건을 일으키자 충신장 사건 이후 다무라 가의 정원에서 할복한 선한 무사의 영혼이 바위를 흔들고 소리를 내어 경고해 준 것이라는 내용이다.
물론 이야기는 전적으로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쓰인 것인데,
단순히 환영으로 사건의 단서를 확인하고, 미스테리를 풀어나가는 설정이었다면 평이하고 밋밋했을 이야기를
짤막하게 내려오는 전설과 일본 국민 문학의 소재가 된 역사적 사건을 잘 버무린 것이 이 소설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 것 같다.
마치 실록에 <1609년 9월 22일 강원도에서 미확인비행물체가 목격되었다>라는 [광해군일기] 한 줄로
'별에서 온 그대를' 만들어 낸 것과 비슷한 느낌?
주인공 오하쓰가 그녀의 능력으로 사건의 단서를 찾아내면, 오캇피키인 오빠 로쿠조가 사건의 관계자를 수사하거나 범인을 체포하는 콤비 플레이도 흥미로운데,미야베 미유키의 에도 시리즈물 중 오하쓰를 주인공 <말하는 검>과 <미인>도 추가 구매가 필요할 것 같다.
피리술사 이후 미미여사의 에도시대 시리즈를 모으고 있는데, 다 모으려면 그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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