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살인자의 해체된 기억 - 살인자의 기억법
살인자의 기억법 - 김영하 지음/문학동네 |
김영하 작가 책은 실로 오랜만이다. 대학 시절 도서관에 근무하며 읽었던 <엘리비에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니 13~4년도 더 된 일이다. 그때 그 책 역시도 읽는 데 무리가 없고 문장이 재미있고 생각했다. 작가의 다른 작품을 더 읽어보지 못해 평가하긴 어렵지만 어쩌면 작가의 특징일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국내 작가의 책을 읽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는데, 이 책은 함께 독서모임을 하던 친구를 통해 소개받고 '나중에 읽어봐야지' 했는데, 마침 회사 책장을 정리하다가 발견하고 가볍게 읽어버렸다.
지금처럼 번듯한 과학수사도 거리나 상점마다 설치된 CCTV도, 자동차마다 달린 블랙박스도 없던 시절에는 범죄가 조금 더 쉬웠으리라. 한밤중에 인적이 드문 곳에서 누군가를 납치해 살해하고 몰래 묻는다 해도 목격자만 없다면, 미제 사건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마치 화성 연쇄살인 사건처럼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 김병수는 바로 그런 시절의 연쇄살인범이다. 이제 70대가 되어 더는 살인을 하지 않으며 20대의 어린 딸과 평범하게 살고 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살인의 추억, 출처:네이버 영화>
그러던 어느 날 그를 둘러싼 기억들이 하나씩 사라져 가기 시작한다. 딸의 얼굴을 기억해내지 못하거나 자신의 집 개를 알아보지 못한다거나 알지 못하는 곳을 헤매다 경찰의 손에 이끌려 집에 귀가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알츠하이머였다.
하나씩 기억이 사라져 가고 있는 그때 그의 주변에 수상한 남자 하나가 나타난다. 그는 기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지만, 이 수상한 남자로부터 딸을 지켜내야 한다는 한 가지 사실만은 더욱 또렷하게 기억해내고, 다시금 과거의 살인들을 떠올리며 살인을 막기 위한 살인을 계획한다. 하지만 어디서부터가 진짜 기억이고, 어디서부터가 만들어진 기억인지 결국 기억해 낼 수 없다.
짤막한 문장. 아포리즘. 빠른 전개. 냉소적인 어투. 그리고 장편 소설이라고 하기엔 모자란듯한 짧은 분량.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놓은 주인공의 기억 파편. 그리고 반전. 이 모든 것이 어울려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한 권을 뚝딱 읽어버렸다.
기억은 언제나 미화된다. 하물며 이가 빠지듯 군데군데 기억이 하나씩 빠져버린 알츠하이머 환자가 그 빈 공간을 채워 넣은 기억들이 온전할 리 없다. 책을 덮고 나의 기억은 온전한가 되돌아본다. 가끔 지난 시절 사랑했던 사람이라며 떠올리는그 사람은 실제의 그 사람이 맞는가? 아니면 그 사람에 대한 좋은 기억이 만들어낸 상상 속의 그 사람인가?
'그래도 그때 참 즐거웠지'라고 돌이키던 학창시절, 대학 시절, 이전 직장의 기억들... 그것들도 어쩌면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그리워하며 미화된 기억이 아닐까?
<대개 첫사랑의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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