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노 게이고가 건네는 쓴 웃음의 보따리, <흑소소설>
<괴소소설>을 시작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웃음'을 소재로 한 단편 소설을 읽고 있다.<괴소소설>이 묘하게 '스필버그의 어메이징 스토리' 느낌이 나는 괴팍한 상상력이 담긴 작품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면 <흑소소설> 쪽은 훨씬 유쾌했다. <괴소소설>에서 마주쳤던 섬뜩함이 없어 좋다. 이 정도라면 그냥 마구 웃어넘겨도 좋을만큼.
총 13편의 단편이 수록된 <흑소소설>은 블랙유머를 주제로 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는. 그중 단연 이 단편집의 주제와 잘 어울리는 작품은 <웃지 않는 남자>로 별로 웃기지 않는 삼류 개그 콤비가 일류 호텔에 묵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두 명의 개그 콤비는 호텔에 묶는 하룻밤 동안 자신들의 '개그감'을 높이기 위해 호텔의 벨보이를 대상으로 개그를 시도한다. 하지만 그들의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벨보이는 절제되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두 사람을 좌절시킨다. 이윽고 하루가 지나고 체크아웃을 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벨보이에게 자신들이 '개그맨'이라는 사실을 밝히지만, 그 이야기에 어떤 짓을 해도 웃지 않던 벨보이가 피식 웃어버리며 이야기가 끝나버리며 독자들이 썩소를 짓게 만든다.
다른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다. 유전병으로 극상의 시력을 갖게 된 남자가 현미경만큼이나 좋아진 시력 때문에 불편을 겪는 <시력 10.0>이나 약품 연구 중 실수로 발기부전(임포텐츠)을 일으키는 약을 발명하며 벌어지는 <임포그라>, 독신자 여성 아파트의 쓰레기 버리는 날 삼삼오오 모여서 쓰레기를 뒤지는 스토커들의 이야기 <스토커 입문>, 일종의 정신병으로 모든 여성들의 가슴이 커다랗게 보이는 환각을 겪는 그래서 그것을 즐기지만 결국 환각과 현실의 차이에서 씁쓸함을 느끼게 되는 남자의 <거대유방증후군> 등 상상만해도 웃기는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신데렐라 백야행> 역시 돋보인다. 만약 신데렐라가 왕자를 만난 것이 모두 신데렐라의 계획이었다면? 계모가 아버지에게 시집오고, 유리구두를 흘리는 것까지 모두 신데렐라의 계산이었다면? 기존의 동화를 비틀어버리며 독자를 뒤통수 치는 반전을 보여주는 이 작품 속 신데렐라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백야행> 속 캐릭터를 연상시킨다.
그 밖에도 출판사와 문단을 다룬 <최종심사>, <불꽃놀이>, <과거의 사람>, <심사위원>은 서로가 각각의 이야기이지만 연결되는 내용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이 반복되며 문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출판사와 작가들의 뒷 이야기를 돌려서 풍자한다. 총 13편의 이야기가 쉴 틈 없이 웃겨 반나절도 걸리지 않고 쉽게 읽어 넘길 수 있었다. 다양한 작품을 통해 그의 필력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의 단편들 역시 장편 못지 않게 훌륭하다.
흑소소설 -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바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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